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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00:28:145343 
진나라의 통일과정-2. 변법과 경제실력의 확충
양승국
일반

진나라의 통일과정2


기원전 771년부터 기원전 221년 동안 계속되었던 혼란기 즉 춘추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 역사상 진나라가 처음으로 통일한 이유로서 다음의 네 가지 이유를 든다.


1) 변법의 시행

진효공이 상앙을 등용하여 행한 변법의 결과 진나라는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다.

2) 인사제도

인사시스템의 정상적인 작동으로 당시 중국의 가장 뛰어난 인재들은 모두 진나라로 모여들어 나머지 육국과의 적고 큰 싸움에서 모두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3)지리적인 위치

사면이 산악과 사막으로 둘러싸인 주위가 비옥하고 광할한 사방 1000리에 달한다는 관중 평원에 위치함으로써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4) 사천평원의 확보

사마착의 건의를 받아들인 진혜문왕이 사천평원을 손에 넣음으로써 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물적 인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1. 주나라의 동천을 도와 제후의 대열에 서고 기산 이서의 땅을 할양받다.

원래 진나라는 지금의 감숙성 천수시(天水市) 일대에 살던 이민족의 조그만 부용국 에 불과했다. 기원전 771년 서주가 견융의 침략으로 망할 때 당시의 섬진의 군주였던 진양공(晉襄公 : 재위 기원전 777 - 766)은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주나라를 구원하고, 이어서 주평왕이 도성이었던 호경(鎬京)을 버리고 낙읍으로 천도할 때 도왔다. 진나라는 그 공로로 부용국의 위치에서 백작국(伯爵國)으로 승격되었고 다시 주나라로부터 기산(岐山) 이서의 땅을 할양 받아 명실공히 강대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부용국/ 세력이 미약한 제후국을 이르는 말. <예기(禮記)>에 따르면 영지(領地)가 사방 50리를 넘지 못해 공(公), 후(侯), 백(伯), 자(子)남(男) 등의 5등급 안의 제후(諸侯)에 들지 못하는 소국의 영주들을 말하는 것으로 천자에게 직접 조회(朝會)를 드리지 못하고 5등급에 속한 제후들이 조회를 드리러 갈 때 곁붙여서 해야만 했던 관계로 ' 부속하여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의미의 부용(附庸)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즉 봉건 제도 하의 질서로는 제후와 동급이기는 하지만 영토나 세력 면에서 독립된 제후 역할을 할 수 없는 소군주 혹은 그들이 통치하는 작은 나라들을 일컫는다. 춘추시대부터는 주로 당진(唐晉)), 초(楚), 섬진(陝秦) 등의 강대국들이 무력으로 자기 영토로 편입시킨 다수의 소국들을 지칭했다.


그림1 기원전 771년 낙읍으로 동천하기 직전까지의 진나라 정세도.


주나라가 관중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나라를 천도하며 그들의 발흥지인 기산(岐山) 이서의 땅을 진나라에 할양한 것은 이미 호경(鎬京) 근처로까지 진출한 융족의 압력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진나라가 주나라로부터 기산 이서의 땅을 할양 받았다고는 했지만 그것은 명목상의 할양에 불과했던 것이다. 진나라는 기산 이서의 땅을 자기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서100여 년 가까이 융족과 끊임없이 전투를 벌려야 했다. 그 과정에서 진양공을 포함하여 여러 명의 군주가 싸움 중에 전사하기도 했다.


그림2 동주가 시작되고 진목공(秦穆公)이 즉위하기 전까지의 진나라 발전도)

2. 진목공의 활약


이윽고 진나라가 주나라부터 지금의 섬서성 일대에 해당하는 섬진 지역을 할양 받은 지 100여 년 후인 기원전 659년에 진나라에서는 목공(穆公)이라는 영명한 군주가 등장했다. 그는 백리해와 건숙을 등용하여 당시 변방의 후진국 취급을 받던 진나라를 일약 중원의 여러 제후국들과 그 패권을 다툴 수 있는 강국으로 만들어 춘추오패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 39년 동안 이루어 놓았던 치적도 죽을 때 순장이라는 제도를 행함으로써 일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진목공은 자기가 죽을 때 당시 진나라의 대소 신료 170명을 자기 무덤에 순장시켜 저승을 가는데 동행한다. 시경(詩經) 진풍(秦風)의 <황조가(黃鳥歌)>는 그때 같이 순장되어 죽은 차씨 삼 형제를 애도하는 시가이다. . 진나라의 관료 대부분이 진목공의 주검과 함께 순장되자 그 국세가 급격히 약화되어 진나라는 결국은 예전의 변방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진목공의 치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진목공(秦穆公)의 치적
재위 기원전 659- 621년, 이름은 임호(任好)다. 덕공(德公)의 막내아들이며 성공(成公)의 동생이다.

1. 백리해(百里奚)와 건숙(蹇叔) 등의 모신(謀臣)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했다.

2. 즉위 초에 동쪽의 중원으로 진출하여 패업을 이룩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당진을 공격하여 하곡(河曲)에서 싸웠다.

3. 주양왕 원년, 기원전 651년 하서(河西) 및 하외오성(河外五城)을 섬진에게 할양한다는 제안을 수락하고 군사를 동원 진헌공의 아들 이오(夷吾)를 귀국시켜 그 군주자리에 올렸다. 이가 진혜공이다.

4, 기원전 645년 당진의 혜공이 약속을 파기하고 섬진에게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자 그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당진을 공격하여 한원(韓原)에서 당진군을 대파하고 혜공을 포로로 잡았다. 당진의 혜공은 옛날 약속한 대로 하서의 땅 8개의 성을 섬진에게 할양한 다음 석방되었다.

5. 기원전 641년, 이민족이 세운 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남쪽에 있었던 양(梁)과 대려현(大 縣) 부근의 예(芮)를 멸하고 섬진의 영토에 병합했다.

6. 그 전에 당진의 헌공과 혜공의 핍박으로 중원 여러 나라를 전전하던 공자 중이(重耳)를 기원전 636년, 섬진으로 초치하여 후하게 대접한 다음, 군사를 내어 당진으로 귀국시켜 그 군주자리에 앉혔다. 이가 진문공(晉文公)이다.

7. 다시 진문공이 국내의 반대세력이 일으킨 반란으로 쫓겨오자, 진목공은 군사를 내어 반란을 진압하고 그 정권을 안정시켰다.

8. 기원전 628년 진문공이 죽자 건숙과 백리해의 간하는 말을 뿌리치고 정나라를 기습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정나라 공격을 성공하지 못하고 중도에 회군하는 섬진군은 그 다음 해인 기원전 627년에 효산에서 당진군의 매복에 걸려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9. 이에 진공 방향을 서쪽으로 돌린 진목공은 내사 요(寥)의 계책을 이용하여 융왕(戎王)과 그 신하를 이간시켜 그 결과 섬진국에 항복해 온 유여(由餘)의 계책을 이용, 융국을 포함한 서융의 20여 개 나라를 병탄하여 천여 리에 달하는 영토를 넓혔다. 이에 진목공을 서융의 패자가 되었다.

10. 그러나 그가 이루었던 패업도 기원전 621년 죽을 때 170명에 달하는 섬진의 대소 신료들을 순장시킴으로 해서 허사가 되었다.


그림3. 진목공 재위시 진나라의 발전도

3. 상앙의 변법으로 인한 국가체제의 정비와 경제실력의 확충

그 이후 진나라는 간신히 명맥을 이어 내려오다가 다시 중원 제국에 얼굴을 들기 시작한 것은 진헌공(秦獻公)의 뒤를 이은 진효공(秦孝公)때부터였다. 진헌공은 진나라의 발전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순장제도를 폐지한 군주다. 진효공은 기원전 361년 즉위하여 24년간 재위에 있다가 기원전 338년에 죽었다. 그는 재위 중 상앙이 건의한 변법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진나라가 중국을 퉁일할 수 있는 제도적인 기틀을 마련했다.



1. 상앙의 변법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로써는 상앙(商鞅)이라는 법가 사상가를 등용하여 변법을 시행했기 때문이었다. 효공은 그의 재위 3년 만인 기원전 359년 상앙을 대양조(大良造)라는 관직에 임명하여 진나라의 국정을 맡겼다.


상앙은 원래 전국시대에는 미미한 소제후국의 위치로 전락하여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던 위(衛)나라 군주의 서자였다. 젊어서 형명학에 심취하였으며 후에 위(魏)나라의 재상 공숙좌(公叔座)의 식객이 되었다. 공숙좌는 상앙의 재주가 비상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위왕(魏王)에게는 천거하지 않았다. 이윽고 공숙좌가 늙어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자 위혜왕(魏惠王)이 찾아와 그의 후임에 누구를 세우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었다. 공숙좌가 상앙을 천거하자 위혜왕은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돌아가려고 하였다. 이에 공숙좌가 위왕에게 상앙을 임용하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죽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위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가 조정에서 다른 신하들에게 공숙좌가 죽을 때가 되니 정신이 혼미해졌다고 하면서 말했다.

“ 처음에는 자기 대신 재상으로 쓰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다시 그를 죽이라고 하니 공숙좌가 죽을 때가 되니 정신이 오락가락하게 된 것 같소.”

공숙좌는 위왕이 돌아가고 난 다음 상앙을 불러 자기가 그를 왕에게 천거했지만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그를 임용하지 않으려거든 죽이라고 간했다고 하면서 상앙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말해 주었다. 상앙이 대답했다.

“ 나를 쓸 혜안도 갖지 못한 왕인데, 어찌 나를 죽일 생각을 하겠습니까?”

상앙은 아무데고 가지 않고 계속해서 위나라에 머물렀다. 이윽고 진나라의 새로운 군주로 즉위한 효공이 천하의 인재를 찾기 시작했다. 그 소식을 접한 상앙은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갔다. 총신 경감의 주선으로 효공과의 세 번에 걸친 면담 끝에 등용되어 진나라에 변법을 시행하게 된다. 상앙이 행한 변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백성들을 십(什) 또는 오(伍)로 짜서 통반(統班)을 만들어 서로 감시하게 만들고, 그 죄에 대해 연좌하게 한다.


2) 죄지은 자를 고발하지 않는 자는 허리를 베는 형에 처마며 그 죄를 고발하는 자는 전장에 나가 적의 수급을 베어 온 자에게 내리는 상을 준다.


3) 동료의 죄를 숨긴 자는 적에게 항복한 자에게 주는 것과 같은 형벌을 준다.


4) 아들 두 사람을 두었음에도 분가하지 않은 자에게는 그 세금을 두 배로 올린다.


5) 군공이 있는 자에게는 그 공의 비율에 따라 상등의 벼슬을 주고 사사로운 싸움을 한 자는 각각 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을 내린다. (여기서 사사로운 싸움이란 부족간의 벌어지는 분쟁이다. 당시는 국가보다는 부족이 상위개념이라 부족간에 싸움이 국가가 덜이는 전쟁보다도 우선이었다. 상앙은 이 싸움을 금한 것이다.)



6) 농사짓고 길쌈을 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아 곡식과 피륙을 많이 바친 자에게는 부역을 면제한다. 상공업을 일삼는 자와 게을러서 가난한 자는 모두를 붙잡아서 노예로 만든다.


7) 종실일지라도 군공이 있지 않으면 심사하여 공족의 족적(族籍)에서 제외한다. 높고 낮은 작위와 녹봉의 등급을 분명히 하여 각각 등급과 차례가 있게 하여 점유하는 전택, 신첩과 의복의 제도는 그 집의 신분에 따라 차례를 정한다.


8) 공이있는 자는 현달하고 영화스럽게 하며 공이 없는 자는 비록 부유하더라도 화려하게 살 수 없다.

그림4. 상앙 등용시 전국칠웅의 정세도



이윽고 법을 시행하자 진나라의 태자가 맨 처음으로 법을 위반했다. 상앙은 태자는 군주 자리를 이어가야 할 사람임으로 직접 벌을 줄 수는 없고 태자를 가르친 그의 태부와 사부의 잘못이라고 했다. 태부 공자건(公子虔)은 참수형에 처하고 사부(師傅) 공손가(公孫賈)는 묵형(墨刑)에 처했다. 후에 상앙은 이 일이 있고 난 21년 후인 효공의 뒤를 이은 태자 즉 혜문왕과 공손가에 의해 반란죄로 몰려 살해 되었다.


상앙은 공숙좌의 예언대로 그의 변법으로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진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되었던 전국 시대 초기 당시 중원 최강의 위나라를 공격했다. 상앙의 진군은 공자앙이 이끌던 위군을 궤멸시켜 진나라 건국 이래 숙원이었던 중원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진나라가 중원의 강국으로 재등장하고 마침내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왕조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상앙의 등용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변법을 시행하여 신상필벌과 농업생산력을 높여 국부를 흭기적으로 증대 시켰다. 이어서 증대된 국력을 기반으로 그때까지 중원의 강국으로 군림하였던 위(魏)나라를 굴복시켜 황하 동쪽의 땅을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상앙은 등용된 지 21년 만에 그 첫 희생자인 태자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그가 세운 변법의 정신은 기원전 207년 진나라가 항우에 의해 망할 때까지 계속되어 진나라의 통치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너무나 엄격한 법의 시행으로 인하여 매년 마다 양산되는 수십 만의 죄수들과 그리고 매일 마다 사형에 처해지는 600명에 달하는 사형수의 숫자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법으로 흥한 진나라는 결국은 법으로 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매일 마다 위수 강안에서 처형되는 사형수들이 흘린 피로 위수는 항상 붉게 물들어 있었다는 사서의 기록도 있다. 상앙에 대한 이야기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중 <상군열전(商君列傳)>에 자세히 나와 있다.


2) 사천평원(四川平原)의 점령


효공과 상앙이 죽은 해는 기원전 338년이다. 그리고 진나라가 사마착(司馬錯)을 보내 사천 평원의 촉과 파 두 나라를 점령한 해는 기원전 316년이다. 광할하고 비옥한 땅의 수많은 인적자원과 물자들이 생산되는 사천 평원을 진나라가 차지했다는 것은 진나라의 국력이 다른 육국에 비해 월등히 강해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5. 진혜문왕 치세시 사마착이 점령한 촉과 파

진나라가 사천평원을 손에 넣은 지 38년 후인 기원전 278년, 진소양왕(秦昭襄王) 29년에 진나라의 장군 백기는 장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사천평원의 풍부한 인력과 물자로 초나라의 배후를 공격한 사마착(司馬錯)과 장약(張若)의 지원 하에, 진나라의 남쪽 관문인 무관(武關)을 나가 한수의 순류를 타고 초나라를 기습했다. 백기는 초나라의 영도(▩都)와 그 일대의 주요 성읍을 모두 함락시키고 그 땅에 남군(南郡)을 설치하여 진나라의 군현으로 삼았다. 초나라의 도성 영도(▩都)는 기원전 689년 초문왕(楚文王)에 의해 그 도성이 된 이래 초혜왕(楚惠王) 때인 기원전 506년 오자서(伍子胥)와 손무(孫武)에게 한 번 빼앗긴 외는 근 400년 동안 외적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는 철옹성과 같이 견고한 성이었다.


그림6. 장약과 사마착의 지원하에 초나라를 기습한 백기의 진군로와 초나라의 이동로


초나라는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荊州市)인 영도에서 쫓겨나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인 진성(陳城)으로 그 정부를 옮겼다. 후에 진나라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기원전 253년 지금의 안휘성 태화현(太和縣) 동쪽의 거양(巨陽)으로 옮겼다가 다시 기원전 241년 지금의 안휘성 수현(壽縣)인 수춘성(壽春城)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기원전 223년 진나라의 장수 왕전(王▩)에 의해 멸망한다.


3) 도강언(都江堰)의 건설

지금의 사천성의 성도(省都)는 성도(成都)이다. 삼국지의 등장인물로 유명한 유비가 촉나라를 세우고 도읍으로 삼은 곳이다. 이 곳에 가면 도강언(都江堰)이라는 수리시설이 있다. 도강언이 만들어진 해는 진나라 소양왕(昭襄王 : 재위 기원전 306-251년) 말년이라고 했으니 기원전 250년 좌우였을 것이다. 관개 수로에 의해 개간된 땅은 모두 6만 ha 즉 한국 평 수로, 1억 8천 만평, 지금의 서울시 면적 정도의 땅에 해당된다. 이 도강언의 공사는 소양왕 때의 촉군태수인 이빙(李氷)이 시작했다가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이이랑(李二郞)이 이어 받아 양 대에 걸쳐 완성되었다. 도강언의 수리시설은 후대로 계속 내려오면서 보수와 확장 공사를 거치면서 엄청난 넓이를 자랑하며 지금도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이빙이 기원전 3세기 초에 도강언을 건설하면서 세운 이론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통하는 수리공학의 원리가 되고 있다.


深淘灘, 低作堰(심도탄, 저작언)

遇灣截角, 逢正抽心(우만절각, 봉정추심)


무슨 뜻이냐 하면

<여울은 준설할 때는 깊이하고, 뚝을 만들 때는 낮게 한다. 물굽이를 만나면 모서리를 다스리고, 물길이 곧은 곳은 가운데를 뽑아낸다.>


사천성의 인구는1억여 명이며, 2천 5백만의 중경시가 몇 년 전에 직할시로 승격하여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약 1억3천 명 이었다. 그것도 개방화 이후에 광동성으로 빠져 나온 인구를 빼고 나온 수치이다. 광동성의 경우 1949년 통계에 보면 3000만 이었던 것이 지금은 8천만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그 인구 증가분의 약 40%가 사천성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따라서 사천성의 인구는 1990년 대 기준으로 보면 1억5천만 이상이 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유독 인구가 사천성에만 집중된 이유 중에 하나로 꼽는 것은 수리시설의 확충으로 농업생산물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하게 높아 타 지역에 비해 농민들이 살기에 다소나마 여유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천평원의 확보와 이어 그곳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농업생산물로 진나라의 국력은 배가되어 통일전쟁을 위한 경제적인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림7. 도강언 전경



그림8. 도강언 조감도


4) 정국거(鄭國渠)


원래 전국시대 초기에는 진나라와 국경을 직접 접하고 있던 나라는 위나라였다. 그러나 진나라의 압박에 못 이긴 위나라가 황하 양안의 땅 하서와 하동의 땅을 모두 진나라에 바치고 그 도읍을 한나라 동쪽인 대량으로 옮겨버리자 한나라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춘추 때 정나라를 합병하고 그 영토 내에 천자국인 주나라를 포함하고 있었다. 때문에 진나라는 항상 한나라를 공격하여 자기들의 영토로 삼아 주나라가 가지고 있던 하왕조(夏王朝) 이래로 내려오던 전국(傳國)의 보기(寶器)인 구정(九鼎)을 탐내고 있었다. 한나라는 전국 때 국세가 가장 약한 나라였다. 진나라로부터 계속해서 시달림을 받은 한나라는 한 가지 계책을 냈다. 한나라의 유명한 토목기술자를 진나라에 보내어 거대한 토목공사를 일으킬 수 있게 된다면 그 공사에 국력을 쏟아 붇게 되어 한나라는 한 숨을 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나라가 그 토목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의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재정이 파탄이 나 버리면 더욱 좋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나라의 유명한 토목기술자인 정국(鄭國)이라는 사람을 진나라에 보내 위수 북안의 황토고원에 토목공사를 벌려 관개수로를 만들 경우 그곳에서 생산되는 농업생산물로 인하여 진나라의 재정은 넘쳐 날 것이라고 당시의 진왕(秦王)인 진시황을 설득하게 했다. 진시황이 정국의 말에 혹하여 수리시설 공사를 대대적으로 벌렸다. 다음은 사마천의 사기 하거서(河渠書)에 나오는 기사이다.

< 한나라는 진나라가 토목공사를 벌이기를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국력을 소모시켜 동쪽으로 나와 한나라를 공격할 여력이 없도록 진나라를 설득하여 경수(涇水)를 파서 그 물을 동쪽으로 끌어 중산(中山)의 서족 호구(瓠口 : 자금의 산서성 경양(涇陽) 서북)에 이르는 운하를 건설하고 다시 북산을 따라 동으로 300여 리를 연장하여 락수(洛水)와 연결시켜 수리시설을 위한 토목공사를 벌리게 만들었다. 공사를 하던 중에 정국이 한나라의 간첩이라는 것이 발각되어 진시황이 정국을 처형시키려고 하자 정국이 말했다. “ 처음에는 제가 한나라의 간첩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공수로가 완성되면 진나라에 커다란 이로움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진시황이 정국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공사를 마무리 짓도록 했다. 이윽고 수리시설이 완성되자 황토가 침전된 물로 염분이 많은 토지 4만여 경에 물을 댈 수 있었는데 무당 일종(一鐘)의 수확을 낼 수 있었다. 이 후로는 관중 지역은 비옥한 농경지로 변했고 흉년이라고는 들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진나라의 국력은 더욱 강성해지고 마침내 나머지 제후국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 할 수 있었다. 그래 이 운하의 이름을 정국거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림 9. 정국거 위치도


전국시대 때의 일경은 한국 평수로 5,500평이고 일경은 100무이다. 그리고 일종(一鐘)은 10섬이다. 즉 정국거를 건설함으로 인하여 새로 생긴 농경지는 4만 경 즉 2억 2천만평에 그곳에서 난 곡식의 량은 4천만 섬에 달했다는 이야기이다. 옛날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다고 할 때, 당시 야당에서는 국도도 포장이 안 된 상태에서 고속도로는 시기상조가 아니냐고 반대를 했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경부고속도로야말로 한국이 산업화하는데 이정표를 세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작은 비록 불순한 동기에서이지만 그 목적하는 바와는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역사에는 종종 있다. 지금 진행 중인 경부고속철도도 지금 입장에서 보면 많은 낭비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경부고속도로나 정국거처럼 한국이 세계경제대국으로 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며 더욱이 남북의 자유왕래를 촉진시키는데 일조를 할 것으로 본다.

전국시대 후반부 내내 진나라가 몇 십만 명의 대군을 일으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저력은 도강언 및 정국거를 이용하여 생산된 농업 생산물에 의한 재화의 확충 때문인 것이다.


<기원전 2200년 전에 건설된 갑문식 운하 영거>


그 밖에 진시황이 6국을 멸하고 통일제국을 창건한 지 2년 후인 기원전 219년 호남성에 순수 나갔을 때 호남성을 남서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훌러 동정호로 흘러 들어가는 상강의 상류지역에 이르렀다가 주강의 지류인 계강(桂江)과 연결했던 영거(靈渠)라는 운하이다. 영거는 착공한지 5년 만인 기원전 214년에 완성된 이 운하의 총 길이는 33키로에 달했고 이 운하는 결국은 장강과 주강(珠江)을 연결한 것이 되었다. 진시황은 이 운하를 건설하여 50만의 대 병력과 군수물자를 강남으로 운송하여 당시 백월이라고 부르던 지역을 점령하고 중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특이한 것은 상강과 계강의 수위가 서로 달라 선박의 왕래가 불가능한 것을 갑문식 운하를 만들어 배가 다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갑문식 운하로 유명한 것이 파나마 운하다. 파나마 운하의 전장은 85키로라 하나 주로 평지를 굴착하여 만든 것에 비해 지금으로부터 2200여 년제 만들어진 중국의 상수와 계강의 상류지역인 해발 1000미터 이상의 산악지역에서 행해졌다는데 그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림10. 영거로 연결된 장강과 주강 유역도


그림11. 영거유적지


그림12. 영거의 갑문 구조도


진나라의 통일과정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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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08-04-18
[일반] 과진론(過秦論))

다음은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 말미에 전재된 전한의 가의(賈誼)가 쓴 진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 관해 쓴 글이다. 진나라가 어떻게 해서 중국
운영자 08-01-11
[일반] 진소왕의 영토확장과 그의 업적

진소왕(秦昭王) 소양왕(昭襄王)이라고도 한다. 재위 기원전 324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306년에 진왕의 자리에 올라 기원전 251년에 죽었다. 진시
양승국 05-11-27
[일반] 진나라의 도성 이동사와 이동로

1. 기원전 16-11세기 감숙성 동부의 천수 감곡 일대에서 일어났다. 2. 기원전 11세기(서주초기) 서견구(西犬口) 일대에서 성을 쌓고 주왕조
양승국 04-10-09
[일반] 진나라의 통일과정-연표

연도 군주명 대 사 표 361 효공 원년 효공이 진나라 군주에 올라 개혁을 담당할 인재를 구함. 360 2 상앙
양승국 04-07-20
[일반] 秦과 趙의 장평대전(전260년) 직전의 정세와 발발의 원인

기원전 266년 진나라의 상국이 된 범수의 원교근공책을 채택한 진소양왕이 본격적으로 한나라 공격에 나섰다. 한나라 황하 이북의 영토인 상당군을 그
양승국 04-05-12
[일반] 장평대전 전개도

기원전 260년 백기(白起)가 이끄는 진나라 20만 대군과 조괄(趙括)이 이끄는 조나라 40만 대군이 장평(長平)에서 싸웠다. 백기의 작전에 의해
양승국 04-05-12
[일반] [re] 장평대전 전개도-2

진조의 장평대전(전260년) 직전의 정세와 발발의 원인 기원전 266년 진나라의 상국이 된 범수의 원교근공책을 채택한 진소양왕이 본격적으로 한
양승국 05-09-22
[일반] 진나라의 통일전쟁-진조대전과 한나라의 멸망

전국말 진조대전(秦趙大戰) 진행과정 진나라의 승상 이사(李斯)가 한왕(韓王)을 유인하여 항복을 받아 내기 전에, 진왕 정(政)은 최우선적으
양승국 04-05-12
[일반] 전국시대 진과 위의 하서 쟁탈전사

전국시대 진과 위 두 나라가 벌인 서하(西河) 쟁탈전 1. 기원전 412년, 진간공(秦簡公) 원년, 위문후 32년 위문후가 태자격에게 군
양승국 04-05-12
[일반] 섬진(陝秦)의 약사(略史)

진(秦) 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로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국가(BC 221∼BC 207). 건국 BC 10세기 목축으로 이름이 나 있던
양승국 04-05-12
[일반] 진나라의 통일 과정 3- 인사정책

이사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로써 능력있는 외부 인사를 기용한 인사정책을 들고 있다. 원래 화하족이라고 표현하는 중국
양승국 04-05-12
[일반] 진나라의 통일과정-2. 변법과 경제실력의 확충

진나라의 통일과정2 기원전 771년부터 기원전 221년 동안 계속되었던 혼란기 즉 춘추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 역사상 진나라가 처음으
양승국 04-05-12
[일반] 진나라의 통일과정-1. 기원과 국가체제의 확립

진나라의 통일과정1-진나라의 유래 및 춘추직전까지의 발전과정 섬진(陝秦)의 선조는 제(帝) 전욱(顓頊)의 후예로써 여수(女修)라 했다
양승국 04-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