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자료실
· 오늘 :  561 
· 어제 :  684 
· 최대 :  2,389 
· 전체 :  1,250,770 
 
  2004-05-12 00:27:454904 
진나라의 통일과정-1. 기원과 국가체제의 확립
양승국
일반

진나라의 통일과정1-진나라의 유래 및 춘추직전까지의 발전과정


섬진(陝秦)의 선조는 제(帝) 전욱(顓頊)의 후예로써 여수(女修)라 했다. 여수가 베를 짤 때 검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고 날아가 버리자 여수가 그 알을 받아먹고 아들 대업(大業)을 낳았다. 대업이 소전(少典)1)의 딸 여화(女華)를 취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여화가 아들 대비(大費)를 낳았다. 대비는 우(禹)가 치수공사를 할 때 곁에서 도왔다. 우가 치수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순(舜) 임금이 현규(玄圭)1)를 하사하였다.

1)소전(少典)/ 전설에 나오는 원시사회 말기의 부족장. 지금의 하남성, 섬서와 하남 일대에 살던 부족으로 소전씨의 족장이다. 황제(黃帝)와 염제(炎帝)는 모두 소전씨 출신이라 했다.

2)현규(玄圭)/검은 색의 규. 규란 위는 뾰죽하고 아래는 각이 진 옥기의 일종으로써 천자가 제후를 임명할 때 그 신표로 사용했다.

우가 현규를 받으면서 순 임금에게 고했다.


“ 저 혼자서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대비가 곁에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일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순임금이 말했다.

“ 아! 그대 비(費)여 우(禹)를 도와 공을 세웠구 나! 내가 너에게 조유(皂游)3)를 내리노라. 너의 후손들은 장차 크게 번성할 것이다. ”


3)조유(皂游)/ 검은 색의 깃발 장식. 유(游)는 류(旒)와 통하며 깃발 가장 자리에 메거나 술 따위의 장식품을 말한다.


순임금이 이어서 요성(姚姓)의 옥녀(玉女)를 대비에게 주어 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조유(皂游)를 하사 받은 대비(大費)는 순임금 곁에 있으면서 날짐승과 들짐승들을 조련하며 도왔다. 많은 짐승들이 대비의 말을 알아들었다. 대비가 백예(柏翳)다. 순 임금이 백예에게 영씨(嬴氏) 성을 하사했다.

대비가 아들 둘을 낳았다. 장자는 대렴(大廉)이라 했는데 조속씨(鳥俗氏)의 선조가 되었으며 차자는 약목(若木)으로써 비씨(費氏)의 선조가 되었다. 비창(費昌)은 약목의 현손(玄孫)이다. 비창의 자손들 중 일부는 중국(中國)에 살았고 일부는 이적(夷狄)의 땅에 살았다. 하조(夏朝)의 걸왕(桀王) 때 비창은 하(夏)나라를 떠나 상(商)나라에 귀의하여 탕(湯)임금을 위해 수레를 몰고 출전하여 명조(鳴條)의 땅에서 걸왕과 싸워 이기는데 공을 세웠다. 또한 맹희(孟戱)와 중연(中衍)은 대렴의 현손이다. 그들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사람의 말을 했다. 상나라의 임금 태무(太戊)4)가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말을 몰고 달리게 하고 점을 쳐보게 하였다.

4)태무(太戊)/ 대무제(大戊帝)라고도 한다. 상나라의 10대 왕으로 태강(太康)의 아들이며 옹기(雍己)의 동생이다. 옹기의 뒤를 이어 은나라 왕위에 올랐으나 당시의 은나라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태무가 이척(伊陟)과 무함(巫咸)을 차례로 재상에 기용하여 은나라에 치세를 오게 하고 국세를 회복했다. 태무는 스스로를 엄격하게 다스려 천명을 공경하고 두려워했으며, 항상 백성들을 어떻게 잘 다스릴 것인가 만을 생각하여 감히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지 않았다. 구이(九夷)가 래조하여 조공을 올렸으며 제후들이 귀의함으로써 은나라 왕실은 부흥하였다. 75년 간 재위에 있었으며 시호는 중종(中宗)이다.


점괘가 길하게 나오자 그들에게 임금의 수레를 모는 어자(御者)를 시키고 여인을 구해주어 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상나라의 태무 임금 이후로 중연(中衍)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공을 세우고 은(殷)나라를 도왔다. 마침내 영씨(嬴氏)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스스로 빛내어 제후가 될 수 있었다.

중연(中衍)의 현손(玄孫) 중에 중휼(中潏)이라고 있었다. 그들은 서융(西戎)의 땅에 살면서 서수(西垂)5)의 땅을 지켰다.

5)서수(西垂)/ 지금의 감숙성 천수현(天水縣) 부근으로 섬진(陝秦) 의 발흥지다.


중휼이 비렴(非廉)을 낳고 비렴은 오래(惡來)를 낳았다. 오래는 힘이 장사였고 비렴은 달리기를 잘하였다. 부자가 재능과 용력을 갖추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섬겼다. 주무왕(周武王)이 주왕을 토벌할 때 오래(惡來)를 같이 잡아서 죽였다. 그때 비렴은 주왕(紂王)을 위하여 북방에 사자로 나가 있었다. 비렴이 북방에서 임무를 행하고 돌아왔으나 주왕(紂王)이 이미 죽어 보고할 사람이 없자 곽태산(霍太山)6)에 제단을 쌓고 자기가 다녀온 일을 고하였다.

6) 곽태산(霍太山)/곽산(霍山)을 말하며 현 산서성 곽현(霍縣) 동남 쪽에 있는 산. 태악산(太嶽山)이라고도 함.


그때 비렴은 석관(石棺)을 하나 얻었다. 그 석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 상제께서는 처보(處父-비렴의 자)로 하여금 은나라가 입은 재난을 피하게 하시고 석관을 내려 그 종족을 번성하게 하려고 함이라’

비렴이 죽자 그를 곽태산에 장사 지냈다. 계승(季勝)은 비렴의 막내아들이다. 계승이 맹증(孟增)을 낳았다. 맹증은 주성왕(周成王)의 총애를 받았다. 이가 택고랑(宅皐狼)7)이다.

7) 택고랑(宅皐狼)/ 맹증(孟增)이 고랑(皐狼)에 살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고랑은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이석현(離石縣) 서북쪽에 있었다.


고랑(皐狼)이 형보(衡父)를 낳고 형보(衡父)는 조보(造父)를 낳았다. 조보는 수레를 잘 몰아 주목왕(周穆王)의 총애를 받았다. 목왕은 이름이 적기(赤驥), 도려(盜驪), 화류(驊騮), 록이(騄耳)등 여덟 마리의 명마8)를 얻어 사마(駟馬)로 삼아 서쪽8)팔준마(八駿馬)를 말한다. 나머지 네 마리의 말 이름은 백희(白犧), 거황(渠黃), 유륜(踰輪), 산자(山子)다. 으로 순수(巡狩)를 나가 그 즐거움에 돌아올 줄 몰랐다.

서(徐)나라9)의 언왕(偃王)9)이 란을 일으키자 조보(造父)

가 목왕을 위해 수레를 번개 같이 몰아 삽시간에 주나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주목왕은 하루에 천리를 달려 주나라에 돌아와 서(徐)나라의 란을 진압했다.


◆9) 서(徐)/ 지금의 강소성 사홍현(泗洪縣)에 있었던 제후국

◆10)서언왕(徐偃王)을 말한다. 서주 때 서이(徐夷) 족의 왕이며 영성(嬴姓)이고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주목왕(周穆王) 때 그는 지금의 안휘성, 강소성(江蘇省)의 회수(淮水) 일대 오백여 리를 점령하고 인의(仁義)로써 나라를 다스려 백성들의 인심을 샀다. 이어서 주위의 30여 제후국의 옹립을 받아 왕이 되었다. 마침내 주궁(朱弓)과 적시(赤矢)를 얻어 스스로 하늘의 서기(瑞氣)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언왕(偃王)이라고 칭했다. 주목왕이 서쪽으로 순수를 나가 오랫동안 나라를 비운 틈을 타서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주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서쪽으로 나가 하수의 강변에 이르렀다. 주목왕(周穆王)이 나라에 변란이 일어난 것을 전해 듣고 수레를 휘몰아 돌아와 초나라와 연합하여 서언왕을 공격했다. 서언왕은 주나라 군사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싸움 중에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서언왕은 싸움에서 패하자 도망쳐 동해의 섬으로 들어가 성을 쌓고 그곳에서 살았다고 했다. 또한 한비자 오두(五蠹) 편에 < 춘추 때 서국(徐國)의 군주로 국세가 비록 강성했지만 오로지 문덕에만 힘쓰고 무력을 도외시 하여 결국은 초문왕(楚文王)에게 나라를 뺏기고 자신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목왕이 조보를 조성(趙城)11)에 봉했다. 비렴(非廉)이 계승(季勝)을 낳은 이후로 5세인 조보(造父) 때에 이르러 조성(趙城)에 모여서 살게 되었으며 후에 진문공(晉文公)을 따라 유랑하다가 당진(唐晉)의 대부가 된 조쇠(趙衰)가 그의 후손이며 다시 조쇠의 자손들은 당진(唐晉)을 삼분한 조(趙)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오래혁(惡來革)은 비렴의 아들이었는데 일찍 죽었다. 오래혁(惡來革)은 여방(女防)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여방은 방고(旁皐)를 낳고 방고(旁皐)는 태궤(太几)를 낳고 태궤는 대락(大駱)을 낳았다. 대락은 다시 비자(非子)를 낳았다. 이들은 조보가 주왕의 총애를 받아 조성에 봉해 졌기 때문에 모두가 조성(趙城)에서 살게 되었고 성씨를 조(趙)로 삼았다.

11) 조성(趙城)/ 지금의 산서성 홍동현(洪洞縣) 북쪽


비자가 견구(犬丘)에 살면서 말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말을 잘 길렀다. 견구에 살던 사람들이 주효왕(周孝王)에게 비자(非子)에 대한 말을 전하자 효왕이 불러 그에게 견수(汧水)와 위수(渭水) 사이의 땅에서 말을 기르도록 명했다. 말은 크게 번식하였다. 효왕이 비자를 대락(大駱)의 후계로 삼으려고 하였다. 대락의 부인이 된 신후의 딸이 적자(適子) 성(成)을 낳았다. 성(城)이 대락(大駱)의 뒤를 이었다. 신후가 효왕에게 말했다.

“ 옛날에 우리 선조들이 여산(驪山)에서 살 때 그 딸을 융주(戎主)인 서헌(胥軒)의 부인으로 보내 중휼(中潏)을 낳았습니다. 이로써 융족들과 친하게 되어 주왕실에 귀의하게 되고 서수(西垂)를 지킬 수 있어 그곳은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근자에 이르러 우리가 다시 대락에게 딸을 주어 적자(適子)인 성(成)을 낳았습니다. 신(申)과 락(駱)의 두 번에 걸친 중혼(重婚)으로 되어 서융(西戎)은 모두 복종하게 되어 왕께서 보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왕께서는 이 점을 굽어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효왕이 대답했다.

“ 옛날에 백예(柏翳)가 순임금을 위해 가축을 길러 번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순임금께서 백예에게 토지를 주어 제후로 봉하고 영(嬴)이란 성(姓)을 내렸다. 오늘 그 후손이 다시 짐(朕)을 위하여 말을 길러 번식시켜 공을 세웠기 때에 짐이 땅을 나누어 부용(附庸)12)에 봉하려 하는 것이다.”


12)부용(附庸)/ 세력이 미약한 제후국을 이르는 말. <예기(禮記)>에 따르면 영지(領地)가 사방 50리를 넘지 못해 공(公), 후(侯), 백(伯), 자(子)남(男) 등의 5등급 안의 제후(諸侯)에 들지 못하는 소국의 영주들을 말하는 것으로 천자에게 직접 조회(朝會)를 드리지 못하고 5등급에 속한 제후들이 조회를 드리러 갈 때 곁붙여서 해야만 했던 관계로 ' 부속하여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의미의 부용(附庸)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즉 봉건 제도 하의 질서로는 제후와 동급이기는 하지만 영토나 세력 면에서 독립된 제후 역할을 할 수 없는 소군주 혹은 그들이 통치하는 작은 나라들을 일컫는다. 춘추시대부터는 주로 당진(唐晉)), 초(楚), 섬진(陝秦) 등의 강대국들이 무력으로 자기 영토로 편입시킨 다수의 소국들을 지칭했다



이어서 효왕이 비자(非子)에게 진읍(秦邑)의 부용에 봉한 다음 영씨(嬴氏)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진영(秦嬴)이라고 불렀다. 또한 신후의 딸도 폐하지 않고 적자인 성으로 하여금 대락의 뒤를 잇게 하여 서융과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였다.

진영(秦嬴)이 진후(秦侯)를 낳았다. 진후가 재위 10년만에 죽고 그의 아들 공백(公伯)이 뒤를 이었다. 공백이 아들 진중(秦仲)을 낳고 3년만에 죽었다. 진중(秦仲) 3년에 주려왕(周厲王)이 무도하여 제후들 중에서 반란이 일어났다.12)

◆13) 기원전 841년에 일어난 일로써 폭정을 일삼던 주려왕을 국인들이 들고 일어나 쫓아내고 주공과 소공이 왕 대신 나라를 다스리다가 이어서 장성한 려왕의 아들 정을 왕위에 앉혔다. 이를 중국 역사상 공화라 하고 왕위에 오른 주선왕은 선정을 베풀어 주나라를 중흥시켰다.


서융이 주나라에 반기를 들고 쳐들어와 견구(犬丘)에 살던 대락(大駱)의 후손들을 모두 전멸시켰다. 주선왕(周宣王)이 즉위하자 즉시 진중(秦仲)을 주나라의 대부로 삼아 서융을 정벌하게 하였다. 서융이 쳐들어와 진중(秦仲)을 죽였다. 진중이 공백의 뒤를 이어 23년 동안 재위에 있다가 서융의 반격을 받고 싸움 중에 죽은 것이다. 진중에게는 아들이 다섯이 있었는데 장자는 장공(庄公)이다. 주선왕(周宣王)이 장공과 그 다섯 형제들을 불러 그들에게 군사 7천 명을 주어 서융을 정벌하도록 명했다. 장공과 그 형제들이 서융으로 출정하여 융족들을 크게 물리쳤다. 그래서 다시 선왕은 진중의 후손들에게 그들의 선조들이 살았던 견구와 대락(大駱)의 땅을 주고 서수(西垂)의 대부로 삼았다.

장공이 서견구(西犬丘)12)에 살면서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남의 이름은 세보(世父)라 했다. 세보가 말했다.

12)서견구(西犬丘)/ 지금의 감숙성 천수시(天水市) 서남


“ 융족(戎族)이 우리의 조부이신 진중(秦仲)님을 죽였다. 내가 융왕(戎王)을 죽여 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한 다면 나는 결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이어서 군사를 이끌고 융족(戎族)을 공격하러 떠나면서 그의 장자 자리를 동생인 양공(襄公)에게 양보하였다. 양공이 태자가 되었다. 장공이 선지 44년만에 죽자 태자 양공이 뒤를 이었다.

양공 원년 기원전 777년 그의 여동생인 목영(穆嬴)을 풍읍(豊邑)에 살던 융족(戎族)의 왕에게 시집보냈다.

양공 2년 기원전 776년 융족이 쳐들어와 견구를 포위하였다. 세보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맞이해서 싸웠으나 오히려 융족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자 세보는 융족에게서 풀려나 돌아왔다.

양공 7년 기원전 771년 봄에 주유왕(周幽王)이 포사(褒姒)를 총애하여 태자를 폐하고 포사의 소생인 백복(伯服)을 대신 세웠다. 또한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기만하자 제후들은 유왕에게 등을 돌렸다. 서융의 일족인 견융(犬戎)과 신후(申侯)가 주나라를 침범하여 유왕(幽王)을 여산(驪山) 밑에서 죽였다. 진양공(秦襄公)이 주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끌고 가서 힘껏 싸워 주왕실에 공을 세웠다. 주나라가 견융(犬戎)의 난을 피해 그 도읍을 락읍(駱邑)으로 옮겼다. 진양공은 주평왕(周平王)이 락읍으로 천도하는데 군사를 동원하여 호위하였다. 평왕이 그 공에 보답하기 위해 진양공을 제후에 봉하고 기산(岐山)의 서쪽 지역의 땅을 모두 진(秦)나라에 주면서 말했다.

“ 융족이 무도하여 우리에게서 기풍(岐豊)의 땅 을 모두 빼앗아 갔다. 섬진(陝秦)이 능히 융족을 물리쳐 공을 세운다면 그 땅은 모두 섬진(陝秦)의 소유가 될 것이다. ”

평왕이 맹세를 하며 제후의 봉작을 내렸다. 진나라는 양공 때에 이르러 비로소 제후국이 되어 주변의 제후국들에게 사절을 보내고 빙향(聘享)12)의 예를 행할 수 있었다. 이어서 유구(騮驅)12)와 황소, 숫양을 각각 3 마리씩을 희생으로 잡아 서치(西畤)12)의 사당(祠堂)에서 상제에게 제사를 올렸다.

◆17)빙향(聘享)/ 빙(聘)은 제후들이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고 또한 초빙하는 것을 말하고 향(享)은 제후가 천자에게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것을 말한다.

◆18) 유구(騮驅)/검은 털의 갈기에 붉은 색의 몸통을 하고 있는 작은 말

◆19)서치(西畤)/ 지금의 천수현 부근으로 서견구를 말한다. (사기지명고)


< 진나라의 통일과정(1)- 춘추시대 이전까지의 발전과정 끝>

목록
1511
[일반] 진나라의 도성 이동사와 이동로

진(秦)나라의 도성 이동사 1. 기원전 16-11세기 감숙성 천수(天水), 감곡(甘谷) 일대에서 일어났다. 2. 기원전 11세기(서조초기) 천수
양승국 04-10-16
[일반] 진나라 군주 계보도

진나라 군주계보도 ▪非子(約前900—前858年) ▪ 秦侯 ( 前857—前848年) ▪ 公伯 ( 前847—前84
운영자 08-04-18
[일반] 과진론(過秦論))

다음은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 말미에 전재된 전한의 가의(賈誼)가 쓴 진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 관해 쓴 글이다. 진나라가 어떻게 해서 중국
운영자 08-01-11
[일반] 진소왕의 영토확장과 그의 업적

진소왕(秦昭王) 소양왕(昭襄王)이라고도 한다. 재위 기원전 324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306년에 진왕의 자리에 올라 기원전 251년에 죽었다. 진시
양승국 05-11-27
[일반] 진나라의 도성 이동사와 이동로

1. 기원전 16-11세기 감숙성 동부의 천수 감곡 일대에서 일어났다. 2. 기원전 11세기(서주초기) 서견구(西犬口) 일대에서 성을 쌓고 주왕조
양승국 04-10-09
[일반] 진나라의 통일과정-연표

연도 군주명 대 사 표 361 효공 원년 효공이 진나라 군주에 올라 개혁을 담당할 인재를 구함. 360 2 상앙
양승국 04-07-20
[일반] 秦과 趙의 장평대전(전260년) 직전의 정세와 발발의 원인

기원전 266년 진나라의 상국이 된 범수의 원교근공책을 채택한 진소양왕이 본격적으로 한나라 공격에 나섰다. 한나라 황하 이북의 영토인 상당군을 그
양승국 04-05-12
[일반] 장평대전 전개도

기원전 260년 백기(白起)가 이끄는 진나라 20만 대군과 조괄(趙括)이 이끄는 조나라 40만 대군이 장평(長平)에서 싸웠다. 백기의 작전에 의해
양승국 04-05-12
[일반] [re] 장평대전 전개도-2

진조의 장평대전(전260년) 직전의 정세와 발발의 원인 기원전 266년 진나라의 상국이 된 범수의 원교근공책을 채택한 진소양왕이 본격적으로 한
양승국 05-09-22
[일반] 진나라의 통일전쟁-진조대전과 한나라의 멸망

전국말 진조대전(秦趙大戰) 진행과정 진나라의 승상 이사(李斯)가 한왕(韓王)을 유인하여 항복을 받아 내기 전에, 진왕 정(政)은 최우선적으
양승국 04-05-12
[일반] 전국시대 진과 위의 하서 쟁탈전사

전국시대 진과 위 두 나라가 벌인 서하(西河) 쟁탈전 1. 기원전 412년, 진간공(秦簡公) 원년, 위문후 32년 위문후가 태자격에게 군
양승국 04-05-12
[일반] 섬진(陝秦)의 약사(略史)

진(秦) 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로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국가(BC 221∼BC 207). 건국 BC 10세기 목축으로 이름이 나 있던
양승국 04-05-12
[일반] 진나라의 통일 과정 3- 인사정책

이사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로써 능력있는 외부 인사를 기용한 인사정책을 들고 있다. 원래 화하족이라고 표현하는 중국
양승국 04-05-12
[일반] 진나라의 통일과정-2. 변법과 경제실력의 확충

진나라의 통일과정2 기원전 771년부터 기원전 221년 동안 계속되었던 혼란기 즉 춘추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 역사상 진나라가 처음으
양승국 04-05-12
[일반] 진나라의 통일과정-1. 기원과 국가체제의 확립

진나라의 통일과정1-진나라의 유래 및 춘추직전까지의 발전과정 섬진(陝秦)의 선조는 제(帝) 전욱(顓頊)의 후예로써 여수(女修)라 했다
양승국 04-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