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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2-18 11:33:074555 
전국책서(戰國策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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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戰國策) 서(序)


호좌도수사자(護左都水使者) 광록대부(光祿大夫) 신(臣) 유향(劉向)이 아룁니다.


교정(校定)한 비부(秘府)의 서적 <전국책>은 비부에 소장되어 있던 죽간 다발의 나머지들로서 서로 흐트러지고 섞이어 있었습니다. 또 그것과는 별도로 나라별로 기록되어 있던 것도 있었는데 그것은 8편이며 궐일(闕佚)되어 불완전한 책이었습니다. 신은 이 국가별로 된 것에 근거하여 거의 연대순으로 정리하되 아무 순서도 없는 것은 따로 분류해서 그것에 보충을 하고 중복되는 글을 삭제한 결과 33편의 책이 되었습니다. 원래의 문자가 많이 달라졌고, 탈락해서 반이 된 것도 있는데 ‘조(趙)’를 ‘초(肖)’로 썼다든가 ‘제(齊)’를 ‘입(立)’으로 쓰는 등의 문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비부의 책으로서의 원래 이름은 국책(國策), 국사(國事), 단장(短長), 사어(事語), 장서(長書), 수서(脩書) 등,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전국시대의 유세객들이 채용되어 나라의 정사에 참여하고, 그 나라를 위해 입안한 책모이기에 전국책(戰國策)이란 이름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록되어 있는 사건은 춘추(春秋)에 바로 이어지는 시기로부터 초한(楚漢)이 일어나기까지의 245년간의 일이어서 그것들을 모두 교정하고 살청(殺靑)에 정서하여 정본이 생겨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서(序)에 붙여 말한다.


주왕조는 문왕, 무왕이 나라를 일으킨 그 시초로부터 도덕을 존중하고 예의를 장려하여 벽옹(辟雍), 반궁(泮宮), 상서(庠序) 등의 교육설비를 갖추고, 예약과 끊임없는 학습에 의한 풍속의 화육(化育)을 하는, 오상(五常)의 도를 가르치고, 부부유별(夫婦有別)을 바로 잡아 천하 사람들은 모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하는 정신, 돈후독실(敦厚篤實)한 행동의 소중함을 소흘히 하는 자가 없었다. 이리하여 인의의 도가 천하에 충만해진 결과 40년 남짓 사이에 형벌을 사용하는 일이 없어지기도 했다. 멀리 있는 나라들에서도 이런 문화를 사모하여 모두 귀복해왔다. 대아(大雅)와 주송(周頌)의 노래는 그것을 노래하여 주나라의 덕을 사모한 노래다. 주나라도 강왕(康王), 소왕(昭王)의 시대로 내려오면 쇠덕(衰德)의 징조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기강은 아직 단단했었다. 춘추시대에 접어들 무렵에는 이미 4-5백 년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주나라가 남긴 위대한 공업은 유전(流傳)하여 아직 멸절되지 아니했었다. 춘추오패가 일어난 후에도 주왕조를 존숭하며 섬겼다. 오패 이후 당시의 군주들은 덕을 잃기는 했지만 자기의 군주를 보좌하는 신하들, 예건대 정나라의 자산(子産), 진(晉)나라의 숙향(叔向), 제나라의 안영(晏嬰) 등은 주군을 위해 정사를 도우며 중원에서 병립했는데, 아직도 도의로 상호 지탱해나가며 노래에 의해 심화(心和)시키고 서로 감화하였으며, 빙례(聘禮)와 근례(覲禮)를 행하여 서로 교제하고 조회(照會)하여 일당(一堂)에 모이고 맹세를 하여 서로 구원했다. 천자의 명령은 아직 행해지고 있었고 회합한 다음 향례(享禮)를 하는 나라들은 여전히 수치(羞恥)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국도 의존하는 대국을 가질 수가 있었고 백성들도 안식할 토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랬기에 공자는 ‘예양(禮讓)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면 무슨 곤란이 있으리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주나라 교화(敎化)의 여풍은 그 얼마나 위대했었던가?


춘추시대에도 후기에 접어들면 각 나라의 사직을 보좌하고 있던 현자들이 사라져서 예의는 쇠하여졌다. 공자는 시경(詩經), 서경(書經)을 강의하고 예악을 제정하여 왕자의 도를 지극히 명료하게 제시했는데 권세와 인연이 없는 일개 학자에 지나지 않았음으로 그 감화를 받은 사람은 72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천하에 걸출한 인물들이었는데 당시의 군주 가운데 누구 한 사람 그들에게 존경을 표한 자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왕도는 끝내 일어나지 못한 채 끝나버린 것이다.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일어설 수 없고, 권위에 의하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다.’라는 말도 당연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다음 전씨(田氏)가 제나라를 빼앗고, 육경이 진(晉)나라를 분할하여 도덕은 크게 피폐해졌고 상하의 질서가 없어졌다. 진(秦)나라의 효공에 이르러서 예양을 버리고 전쟁을 중시했고, 인의를 팽개친 채 기만을 사용하면서 오로지 임기응변의 부국만을 추구했다. 대저 군위를 빼앗고 나라를 도둑질한 자가 후왕의 반열에 끼어들고, 기만을 한 나라가 흥륭하여 강국이 되었는데 그런 일이 계승 모방되자 자손들은 그것을 배우게 되었으며 상대국을 멸망시키는 일이 시작되어 나라의 대소에 관계없이 병탄코자 하여 군대를 들판에 풀어놓은 채 몇 달 몇 해가 지나고, 유혈은 산야를 물들였다. 부자간에 친애의 정은 사라지고, 형제간에도 화목하지 않으며, 부부간에 헤어지는 일이 빈발하고, 누구나 내일의 생명이 어찌될는지 모르게 되어 도덕은 완전히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말엽에 이런 경향은 점점 더해져서 병거 만승을 낼 수 있는 나라가 7개국, 천승의 나라가 5개국 등이 세력이 균형을 이루어 패권을 다투게 되자 실로 전국지세(戰國之勢)가 되었다. 이익을 추구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잊고 상대방보다 한 발짝이라도 앞서는 데 만족할 줄을 모르며, 나라마다 행정도 교육도 달라져서 각각 자기나라 안에서 법규를 정하되 위로는 천자를 무시하고, 이래로는 제후를 무시했다. 억지로라도 힘이 강함을 다투고 이긴 자가 우위에 섰음으로 전쟁은 그칠 줄을 모르고 기만과 허위가 온 천하에 행해졌다. 당시는 비록 도덕이란 것이 있더라도 베풀 여지가 없고 책모를 가진 강국은 지세의 험조(險阻), 요애(要碍)의 험고를 의지하여 동맹국과 손을 잡고 인질을 교환하여 맹약과 선서를 이중삼중으로 해가면서 그 나라를 지켰다. 따라서 맹자나 순자 등의 유학지사는 당세에서 버림을 받았고, 유세권모의 도당들이 속세에서 존경을 받았다.


이리하여 소진(蘇秦), 장의(張儀), 공손연(公孫衍), 진진(陳軫), 소대(蘇代), 소려(蘇厲) 등등이 종횡단장(縱橫短長)의 설을 만들어내고 주변 사람들이 이 설에 경도되었다. 소진은 합종을 유세하고 장의는 연횡을 유세했다. 연횡이 이루어지면 진나라는 제(帝)가 되고 합종이 이루어지면 초나라가 왕이 된다. 그들이 머무르고 있던 나라는 중시되었고, 그들이 떠난 나라는 가볍게 보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진나라의 국력이 제일 강했고, 제후들은 하나같이 약체였다. 소진은 그 약체인 제후들을 결속시켰다. 그때 육국은 일체가 되어 진나라와 대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진나라는 굉장히 두려워하여 관중에 병력을 집중시킨 채 외부의 움직임에 동요치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천하에 전쟁이 없는 해가 29년이나 이어졌다.


그러나 진나라는 유리한 지세를 점거하고 있었고 권모에 뛰어난 인사들이 모두 진나라에 모여 있었다. 소진은 처음에는 연횡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진나라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동쪽 나라로 갔고 합종을 성사시켰다. 소진이 죽은 후에 장의는 연횡을 도모했는데 제후들은 그것에 따랐고 서쪽을 향하여 진나라를 섬겼다. 그래서 진나라의 시황은 사면의 굳은 요새에 의해, 효산과 함곡관의 험준함에 의해, 농(隴), 촉(蜀) 땅들의 부유함을 차지하고 세객들의 헌책에 귀를 기울이고 6대에 쌓아올린 공열(功烈)에 편승하여 6개국을 한 나라씩 쳐부수고 제후들을 겸병하여 천하를 병탄했다. 사모(詐謀)를 행하는 폐풍에 의지하면서 독실한 성심은 조금도 없었고, 도의의 가르침도 인의의 화독도 무시한 채 백성들 마음을 하나로 엮어나가고 형벌을 가지고 통치에 임하면서 자질구레한 세공(細工)만을 생각했다. 시경, 서경을 불태우고 유자들을 구덩이 속에 파묻는 한편, 요순을 가벼이 여기고 삼왕을 모독했다. 이세황제는 더욱 격하여 은혜를 백성들에게 베푸는 일이 없었다. 민정은 위에 미치지 못했으며, 군신은 서로 시의(猜疑)했고, 육친도 소원했으며, 교화도 도덕도 천박하여 기강은 퇴폐되고, 백성들은 의에 눈을 감아버린 채 불안 속에 빠졌다. 다스리기 14년 만에 천하가 완전히 붕괴된 이유는 기만과 허위를 행하는 폐풍 때문이었다. 왕자의 덕에 비하여 실로 거리가 멀지 않았는가?


공자는 말했다. ‘ 법에 의한 교화로 백성을 인도하고 형벌에 의해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나갈 것만 생각하다가 수치심을 망각할 것이다. 도덕으로 백성을 인도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은 수치심을 알게 되어 착실해진다’라고 - 사람들에게 수치를 알게 해줌으로써만이 교화가 행해지고 보급되는 것이다. 가령 기만을 하고 빠져나갈 길을 만들며 영합하는 짓 따위를 자행하는 자가 위에 선다면 어떻게 나라를 통치해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진나라의 붕괴는 실로 당연 일이 아니었을까?


전국시대, 군주의 덕은 천박했으며 군주를 위해 책모를 세우는 자는 정세를 보아 판단의 자료로 삼고 시세에 따라 획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 계모(計謀)는 위급을 지탱하고 경도(傾倒)를 견디어내는데 모든 각고의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차분하게 한 나라의 정치를 해나가면서 백성들을 교화하는데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력의 행사도 위급을 구해내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모두 빼어난 인재들이 그때마다 군주의 능력으로 실행할 수 있는 범위를 판단하고, 기발한 책모라든가 지혜를 짜내어 위급한 상황을 안태(安泰)한 상황으로 전환하고 멸망해가는 자의 방향을 바꾸어 존속시키도록 한 것으로써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으며 모두 읽어볼 가치가 있다 하겠다.



護左都水使者 光祿大夫 臣向 所校 戰國策 書錄 (명문당 간 전국책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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